오늘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5·18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붕괴되었다.
이를 틈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가시화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 아마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민중운동 및 반군부 세력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더욱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 절정에 이르러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으며 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였고, 시민들과 대규모 정치집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위가 확산되어 가자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현실화하였고, 17일 오후 7시에 공수부대 투입 명령을 내렸다. 신군부는 5월 17일 저녁 비상계엄이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전국에서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5월 16일에 개최된 집회를 해산하면서 약속한 대로 학생들은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였는데 계엄군이 학생들의 해산을 종용하면서 첫 충돌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제3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는 등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이 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되었다.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이른바 '시민군'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5월 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써 27일까지 '민중 자치'가 실현되었다.
계엄군이 철수한 광주는 5·18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해가면서 죽음으로 확보한 성과를 지속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5월 26일까지 매일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민주주의의 사수를 위한 광범위한 동의를 구하였다. 또한 '투사회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횡보 물이 발간되어 대안언론의 기능을 했다.
시민군들은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음식물과 생활용품을 제공하였으며 계엄군과 신군부의 지시를 받던 행정권력이 기능을 상실한 기간은 '시민들이 각자의 생명과 동료 시위대 그리고 광주시민들의 생명과 완전히 동일시했던 정대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시기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하여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즉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전후하여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81년 5월 18일 피해자 집단, 학생, 재야운동 세력이 망월묘역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국가는 이 추모행사가 재발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가했으나, 5월 계승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하게 실행되어 마침내 1997년 5월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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